
안녕하세요. 우리네 삶의 궤적을 노래라는 이름의 일기장으로 기록하는 [뉴토리]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희망가', '목포의 눈물', '홍도야 울지 마라'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환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오늘은 구슬프고 애잔하기 그지없는'황성옛터(1932, 이애리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노래가 단순히 한 시대의 히트곡을 넘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황성옛터'가 품고 있는 낡고도 슬픈 역사의 뒷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폐허가 된 만월대, 바이올린 선율에 실린 눈물
1920년대 후반, 작곡가 전수린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화려했던 고려 왕조의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잡초만이 무성한 폐허가 된 궁궐터 '만월대'였습니다.
달빛 아래 비친 그 황량한 풍경은 당시 나라를 잃고 정체성을 방황하던 우리 민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수린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바이올린을 켰고, 곁에 있던 작사가 왕평은 그 애절한 선율에 가사를 입혔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원제 '황성의 적(荒城의 跡)', 즉 '황성옛터'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통곡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비고1) 여기서 황성은, 황실의 궁궐인 皇城이 아닌 황량해진 성이라는 荒城입니다.
비고2) 1932년 빅타레코드에서 발매한 이애리수의 독집 음반의 곡명은 <황성의적>이고 1941년 남인수가 왕평 추모 공연에서 이 곡을 <황성옛터>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부르면서 이후 제목이 <황성옛터>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겨레의 연인' 이애리수와 단성사의 밤
1932년, 서울 단성사. 신파극단의 공연 막간 무대에 앳된 얼굴의 가수 이애리수가 올랐습니다.
그녀가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라며 첫 소절을 떼자, 극장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객석 곳곳에서 억눌린 흐느낌이 터져 나왔습니다.
당시 이애리수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녀가 무대에 나오지 않는 날이면 관객들이 항의 소동을 벌여 경찰이 출동할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겨레의 연인'이라 불렀습니다.
일제가 금지한 노래,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황성옛터'의 인기가 전국을 뒤덮자, 일제 총독부는 즉각 발매 금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조선 민족의 자각을 선동하고 패배 의식을 조장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습니다.
작사·작곡가는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즉각 체포되는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금지곡이 될수록 노래는 더 빨리 퍼져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몰래 노래를 부르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황성옛터'는 일제의 칼날보다 더 강한 민족의 연대감을 만들어냈습니다.
노래가 불리는 곳마다 고려의 옛 영광을 그리워하며, 언젠가 되찾을 우리 조국을 향한 염원이 함께 서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래에 담긴 철학: 인생의 허무와 위로
'황성옛터'의 가사를 가만히 읊조려 봅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 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이없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이 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성벽은 무너졌고, 그 위에는 잡초(방초)만 무성하게 자라나 있습니다.
눈앞의 현실은 폐허지만, 민중들은 그 '방초'를 보며 인생의 덧없음과 시대의 비극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단순히 슬픔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애도하는 과정을 통해, 오히려 현재를 어떻게 견뎌내고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왜 우리는 지금도 '황성옛터'를 기억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묻습니다.
왜 이렇게 구슬프고 낡은 노래를 다시 꺼내어 보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우리 대중가요의 뿌리를 잊은 채 지금의 화려한 K-POP만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뿌리의 기록:
우리가 현재 누리는 문화는 일제강점기 그 암울한 밤에도 꺾이지 않고 노래를 불렀던 선조들의 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공감의 대물림:
세대를 넘어 '황성옛터'를 들을 때, 우리는 할아버지의 눈물과 어머니의 한숨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증거이자 정서의 근간입니다.
가사 속에 묻어난 역사의 파편
이애리수의 목소리가 깃든 이 노래는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90년 전의 음질은 거칠고 노이즈가 심하지만, 오히려 그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1930년대의 공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 저녁, 조용한 방에서 이 노래를 한 번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단순히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1932년의 어느 날 밤, 단성사 객석에 앉아 있던 우리 할머니들의 마음을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마치며
여러분께 '황성옛터'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요?
혹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아프지만 잊을 수 없는 '나만의 황성옛터'는 어디인가요?
비록 노래 속의 옛터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 노래를 기억하는 우리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끝으로 평생을 가정주부로 살다가 2009년에 향년 99세로 사망하신 이애리수 님을 추모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과 사연을 들려주세요.
함께 음악의 역사를 이어가는 이 기록의 여정에 여러분이 꼭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참고1: 황성옛터 - 이애리수 (1932)
참고2: 남인수 - 황성 옛터(원창곡) - YouTube